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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 민속원

민속원에는 영남대학교 거울못 동쪽과 벚꽃산책길 야산에 모두 6채의 복원된 전통가옥들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1970년대에 이건한 것으로 구계서원·의인정사·까치구멍집·쌍송정·일휴당은 안동댐 수몰지역에서 이건한 것이며, 경주맞배집, 인왕동고분군 복원지는 경주에서 이건, 복원한 것이다.
-의인정사(宜仁精舍)

이 건물은 원래 안동군 예안면 의인마을에 있던 것으로,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놓인 것을 1976년
11월에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의인정사라는 건물의 이름은 원래 이 건물이 위치해 있었던 의인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의 주인이었던 이동엽씨는 순도의 주손이다. 의인 마을의 서편 하류 쪽에, 이들의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인들과 하인들이 모여 살았던 섬마을이 있었던 것을 볼 때 의인 마을의 경제력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건축배치는 대지 420평에 안채, 좌우 옆채, 사랑채 39칸 60평으로 되어 있다. 또 본채 서북쪽으로는 정문인 소슬대문과 행랑채 5칸 11평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동북쪽에는 방앗간, 헛간, 칙간 등의 3칸 7평의 건물이 배치되고 또 본채 좌측편에 칙간 1칸이 섰고 우측편에는 작은 문 1칸이 서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전 47칸 연건평 80평의 대주택이다.

-구계서원(龜溪書院)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에 위치해 있던 서원으로, 이 지역이 수몰되면서 1974년 10월에 영남대학교 민속원 내의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구계서원은 원래 강당 건물 뿐만 아니라 사당건물인 모현사와 일신재, 시습재와 같은 동재· 서재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그후 1896년에 유림의 공론에 의해 강당만 건립되었다. 따라서 강당 건물인 독역재만 이건 대상이 되었다.
구계서원의 향사인물은 고려 말 유학자인 역동 우탁선생(1263∼1342)인데, 역동선생은 원(元)으로부터 정주학에관한 서적을 들여와 독학으로 이를 체계화시켰다. 역동선생이 역학지선으로 숭앙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구계서원의 강당인 독역재는 석축대 위에 부정형 덤벙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건축하였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평 20평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을 덮었다. 이 건물은 중앙 대청 좌우익 협실로 구성되며 중앙대청은 정자 마루다.
좌우익 협실은 각 2칸으로 되어 있는데 좌우 양쪽의 구조가 같다. 동서재와 묘우, 그리고 진덕문은 2000년 12월에중건된 것이다.

-까치구멍집

까치구멍집은 1975년 6월에 안동군 월곡면 도목동에서 민속원으로 이건 복원되었다. 까치구멍집이라는 명칭은
가옥구조의 특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까치구멍집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자연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적응해 왔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까치구멍집이 주로 위치하는 경북 산간지역은 자연이 가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위험에 지극히 노출된 곳이다.
까치구멍집의 공간배치의 특이성은 가능한대로 가옥을 구성하는 모든 공간을 가옥내부의 주거공간 속으로
끌어 들이려는데서 비롯된다. 가옥구조를 이렇게 폐쇄적 공간으로 구성한 이유는 추위를 피하고 외부로부터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가옥구조가 이 정도로 밀폐되어 버리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환기의 문제이다.
까치구멍집에서는 매우 과학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공기의 환류작용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그것
중의 하나이다. 부엌과 외양간에서 나오는 더운 공기를 빼내기 위해서 지붕 용마루 양옆에 환기창을 뚫어 놓았는데 그모양이 마치 까치집과 흡사하게 생겼다. 까치구멍집이라는 이름도 이 환기창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입문과 대청의 문을 마주보게 위치시킨 것도 환기와 관련이 되어 있다.

- 쌍송정(雙松亭)

쌍송정은 1975년 봄에 경북 봉화군 북지리에서 현 위치로 옮겨왔다.
쌍송정의 주인은 조선조 중종 때 유학자였던 쌍송정 금혜(1399∼1484)이다. 금혜는 조선조 중종때 사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중생원시(中生員試)하고 학문을 즐겨하여 노후에는 봉화군 북지리에 복거하여 쌍송정을 구축하였다. 쌍송정은 창립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왔는데, 구기(舊記)가 없어 이전의 개·보수 상황은 살필 수 없지만 현존하고 있는 이광정이 쓴 향기(享記)를 보면 영조 23년(1747년)에 시역하여 2년에 걸쳐 보수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이후도 몇 차례 개·보수하였으나 건물의구조나 양식은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 조선조 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일휴당(日休堂)

일휴당은 원래 안동 예안 오천동에 있었던 건물로 1974년 봄에 현 위치로 옮겨왔다. 주인인 금응협(琴應夾)은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오천 7군자 중의 한 분으로 중종 21년(1526년)에 태어나서 선조 29년(1596년)에 돌아가신분이다. 금응협은 고려 명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금의(琴儀)의 후손으로 쌍송정의 주인인 금혜에게는 현손이 된다.
봉화 금씨는 대대로 학덕을 높이 쌓은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조에는 영남의 문벌가였다.
일휴당은 그 주인인 금응협에 의해 선조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전해내려 오는 당기(堂記) 또는 창립 관계 문서가 없어 확실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일휴당(日休堂)" 현판은 건축할 당시의 것으로 퇴계 이황이 제자인 금응협에게 써 준 것이라 한다. 이후 일휴당은 금씨 문중에서 관리되어 오다가 정조 11년(서기 1787년)에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일휴당은 이때 개축된 것이다.

-경주맞배집

경주맞배집은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내에 형성된 취락지의 건물 중 하나로 1977년 5월에 현 위치로 이건해 왔다.
이 건물은 좌측으로부터, 퇴를 합한 넓은 부엌 1칸과 툇마루를 낸 안방, 대청, 건너방(사랑방)이 각 1칸 순으로 배열된 一字형 집이다. 그리고 부엌은 앞문과 뒷문이 판문으로 되어 있어 전후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경주 맞배집의아름다움은 소박함과 간결한 맛에서 나온다. 홑처마에 처마의 끝만 가볍게 반전시킨 지붕이나 간결한 띠살문 형태의 방문이나 자연적인 굴곡을 그대로 살린 여러 가구의 모양새에서 맞배집의 아름다움이 표출된다.

-경주 인왕동 고분군 이전복원지

여기에 이전 복원되어 있는 경주 인왕동 고분군은 1977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무덤들이다.
당시 조사에서는 항아리무덤 7기, 항아리돌덧널무덤 1기, 돌덧널무덤 9기, 돌무지 나무덧널무덤 10기 등 총 2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사례는 보기 드문 예라 이를 원상 그대로 복원하자는 의견이 많이 제기되었고, 현장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여서 이 중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적석목곽분 11기, 석곽분 8기를 영남대학교 안의 민속원에 이전 복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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