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진평왕 39년(617)부터 신문왕 6년(686)까지 여생을 보낸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뛰어난 고승으로 추앙받는 승려다.
원효의 속성은 설씨로 압량에서 진평왕 39년에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으며, 어머니가 밤나무골을 지날 때 갑자기 산기가 일어나서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했다.
출가 시기는 15세 전후와 9세 두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송고승전에 “초발(艸髮)의 나이에 혜연히 입법하였다” 는 말이 있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수학하였고, 낭지,;혜공, 대안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일정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다.“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지는 것이니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도 오직 식(識)뿐이니 마음 밖에 없거늘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깨달음을 얻고 의상과 헤어져서 신라로 돌아왔다.
그 후 원효는 요석공주사이에 설총을 낳은 후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로 칭하였다. 그렇다고 원효가 불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더욱 자유롭게 교화활동을 펼쳐나가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이러한 원효에 대해서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고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성사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화엄경』의‘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구에서 따서 이름 지어 무애라 하며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
파계 후 원효는 더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술집과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광대들의 칼과 봉을 갖고 다니며 악기를 탔으며, 여염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가 산천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경전 주석서를 쓰고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틀에 매이지 않고 거리낌 없이 생활하였다.
그렇다고 원효의 학식이 부족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였고, 100여종 24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현존하는 것이 20종 23권에 달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과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그의 대표할 만한 저작들이다.
전자는 대승기신론에 주석을 달아 풀이한 책으로 삼문(三門)으로 나누어 해석하였는데, 먼저 종체를 밝히고, 둘째 제명(題名)을 해석하고, 셋째 본문에 대한 구절을 풀이하고 있다. 해석이 간명하고 조직적이며 종합적이어서 여기에서 불교의 지침을 터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대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불타의 광대무변한 설법을 총섭하는 것과, 일심(一心)이 만물의 주추가 된다 것이 이 논의 요지다.
후자는 금강삼매경에 주석을 붙인 책으로 경의 내용에는 대승의 공(空)사상이 저변에 깊이 깔려 있으며,‘대승기신론소’의 일심에 관한 사상을 토대로 이를 더욱 확대시킨 것이다. 삼매(三昧)라는 주제를 수도상의 정신적 단계와 원리를 설명하는 데 국한하지 않고, 인간현실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하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논구하였다. 아울러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당까지 중국 불교에서 제기되었던 교리를 고루 포함하여, 교리의 정립은 물론 불교학의 체계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 학승 체녕(贊寧)은 원효 저술에 대해‘문단을 휘어잡다’라고 찬탄하였을 정도로 빼어난 저술들이었다.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열반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효의 방대한 저술, 새로운 사상의 확립과 통일, 불교의 토착 대중화 등 그의 행적 자체가 불교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리연구와 실천이 결합된 지행합일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원효에게 있어서 추구해야 할 깨달음이란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우주만물의 궁극적인 근원 바로 일심이었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을 중생과 함께 나누는데 일생을 바쳤다. 일연 스님은 원효를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조차 염불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원효의 덕분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원효가 한국 불교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그는 귀족중심의 귀족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던 신라불교를 대중화하였고, 여러종파로 나누어져 있던 불교사상의 통일과 화쟁사상이라는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시켰으며 많은 저술을 남겨 한국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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